남양홍씨 몇세손인지 궁금합니다 우선 증조부 기, 조부 순 , 아버지는 성 , 본인은
우선 증조부 기, 조부 순 , 아버지는 성 , 본인은 지입니다. 당홍계는 대동항렬을 써서 파를 찾기는 어렵다들었는데 항렬표에 35세손에 성 , 지 가 있으면저희 아버지가 35세손이고 저는 36세손인가요
정확한 항렬자를 알아야 원하는 정보를 알 수 있어요
남양(南陽)은 현재의 경기도 수원(水原)과 화성군(華城郡) 일원을 포함한 지역의 옛 지명으로 고구려 때의 당성군(唐城郡)을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당은군(唐恩郡)으로 개칭하였다가 고려초에 다시 당성군으로 고쳤고, 1018년(현종 9) 수주(水州 : 수원)와 인주(仁州 : 인천)에 편입되기도 하였으나 1310년(충선왕 2)에 남양부(南陽府)가 되었다. 조선조(朝鮮朝) 말기에 남양군이 되어 인천부(仁川府) 관할이 되었다가 1913년 군(郡)을 폐하고 그 땅을 나누어 영흥면ㆍ대부면은 부평군(富平郡)에 편입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수원군(水原郡)에 합하였다. 그 후 수원면이 읍(邑)으로 승격되었으며, 후에 수원읍 이외의 땅은 화성군(華城郡)으로 수원읍은 수원시(水原市)로 승격되었다.
홍씨(洪氏)는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여덟 명의 학사(學士)를 문화사절(文化使節)로 고구려에 파견할 때 그 중의 한 사람으로 들어온 홍천하(洪天河)의 후손으로 전한다. 천하(天河)는 고구려에 들어와 유학(儒學)을 가르치고 문화(文化)를 널리 개척했으며, 고구려가 망하고 삼한 통합(三韓統合)에 따라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때 유학(儒學) 발전에 공(功)을 세워 문무왕(文武王) 때 당성(唐城 : 남양의 옛 지명) 백(伯)에 봉해지고 신무왕(神武王)이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추대했으며 효소왕(孝昭王)은 당성후(唐城侯)를 삼았다고 한다. 그 후 당성(唐城)의 지명(地名)이 개칭(改稱)됨에 따라 후손들은 남양(南陽)을 본관(本貫)으로 삼고 고려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태사(太師)를 지낸 은열(殷悅)을 시조(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가문을 빛낸 자랑스런 인물(人物)로는 은열(殷悅)의 6세손 관(灌)이 고려(高麗)에서 예부상서(禮部尙書), 수사공ㆍ상서좌복야(守司空ㆍ尙書佐僕射)에 이르렀으며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이 일어나자 인종(仁宗)을 호위(護衛)하다가 척준경(拓俊京)의 난군(亂軍)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신라(新羅) 김생(金生)의 필법(筆法)을 본받은 당대의 명필(名筆)로 보문각(寶文閣)ㆍ청연각(淸讌閣)의 글씨를 비롯한 보전화루(寶殿畵樓)의 병풍과 편액을 썼다. 충렬왕(忠烈王) 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오른 자번(子藩)은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ㆍ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역임하고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치사(致仕)했다.
충선왕(忠宣王) 때 판삼사(判三司)를 지낸 규(奎)는 진(縉)의 아들로 추성진력정안공신(推誠陣力定安功臣)으로 남양부원군(南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찬성사(贊成事) 선(詵)은 충숙왕(忠肅王) 때 강녕군(江寧君)에 봉군(封君)되어 만호(萬戶)를 지낸 아들 수(綏)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이등공신(開國二等功臣)으로 남양군(南陽君)에 봉해진 길민(吉旼)과 세종 때 전주부윤(全州府尹)을 거쳐 판서(判書)를 역임한 여방(汝方)이 뛰어났다. 윤성(允成)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올라 좌익삼등공신(左翼三等功臣)으로 녹훈(錄勳)되어 인산군(仁山君)에 봉해졌다.
1460년(세조 6) 모련위(毛憐衛)의 야인(野人)이 반란을 일으키자 신숙주(申叔舟)의 부장(副將)이 되어 이를 토벌하고 우의정(右議政)이 되었으며 예종(睿宗) 때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 좌리일등공신(左理一等功臣)이 되었다. 유손(裕孫)은 순치(順致)의 아들로서 일찌기 당대의 석학(碩學) 김종직(金宗直)에게 글을 배워 문장(文章)에 뛰어났으나 벼슬길에 나갈 뜻을 버리고 시주(詩酒)로 세월을 보내어 「청담파(淸談派)」로 일컬어졌다. 한편 학자(學者)로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인우(仁祐)와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에 추봉(追封)된 세공(世恭)은 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오른 적(迪)과 함께 가문(家門)을 빛냈으며 우경(右敬)은 선조(宣祖)의 딸 정인옹주(貞仁翁主)와 혼인(婚姻)하여 당성위(唐城尉)에 봉해지고 봉헌대부(奉憲大夫)가 되었다.
그 외 대사간(大司諫) 천민(天民)의 아들 서봉(瑞鳳)은 인조반정(仁祖反正)에 공(功)을 세워 병조 참의(兵曹參議)가 되고 정사삼등공신(靖社三等功臣)으로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그후 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거쳐 1640년(인조 18) 영의정(嶺議政)에 올랐으며, 문장(文章)과 시(詩)에 능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생전에 그가 병자호란을 겪은 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로 심양(瀋陽)에 잡혀 갈 때 그 슬픈 민족적 심경을 노래한 시조(詩調)가 아래와 같이 전해진다.
압록강(鴨綠江) 내린 물이 프른 빗치 전혀 업네
배위에 하얗게 센 사공(沙工)이 쳐음 본다 하더라.
그의 아들 명일(命一)은 인조(仁祖) 때 문과에 급제하고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낸 뒤 병자호란 때 척화론(斥和論)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장령(掌令)· 필선(弼善)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올라 영안군(寧安君)에 습봉(襲封)되었으며, 서익(瑞翼)의 아들 명하(命夏)는 현종(顯宗) 때 좌의정(左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관찰사 처후(處厚)의 아들 수헌(受瀗)은 숙종(肅宗)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와 좌참찬(左參贊)을 역임하여 우승지(右承旨) 우서(禹瑞),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호인(好人), 대사헌(大司憲) 계적(啓迪), 호군(護軍)을 지낸 림(霖)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순조(純祖) 때 좌찬성(左贊成) 재철(在喆), 대사헌(大司憲) 직필(直弼) 등과 영의정(領議政) 순목(淳穆)은 한말(韓末)에 와서 가문을 빛낸 인물들이다.
특히 순목(淳穆)의 아들 영식(英植)은 개화파의 선봉으로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으며, 만식(萬植)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개탄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항일지사(抗日志士) 재학(在鶴)은 독립운동으로 명성을 날린 기조(基兆)ㆍ범도(範圖)ㆍ병기(秉箕)ㆍ성익(成益)ㆍ승로(承魯)ㆍ식(植)ㆍ원식(元植)ㆍ학순(學淳) 등과 함께 선조(先祖)들의 훌륭한 위업(偉業)을 본받아 조국의 광복과 한민족의 자유수호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후세에 전했다.